공화국의 품에서 영생하는 삶
(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 김세영)
 


  부모가 지어준 이름보다도 《우편국장》, 《자전거반장》으로 사람들에게 더잘 통하는 인민배우 김세영선생,
  그는 희극적인 많은 예술영화들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인민들에게 웃음과 랑만을 준 명배우로서 오늘도 사람들의 추억속에 남아있습니다.
  나라없던 세월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여나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여섯살 잡히던 해에 아버지까지 잃은것으로 하여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김세영선생은 읍거리에서 순회극단 공연을 구경하면서 예술에 취미를 붙였습니다. 
  어느한 문화공단(당시)에 들어간지 4년후에 단장이 된 그는 자기의 예술단체를 부흥시킬 포부를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포들속에서 공연활동을 하였습니다. 
  기타를 타며 부르는 그의 눈물젖은 목소리는 동포들로 하여금 고향과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자아냈고 이것으로 하여 그는 일본땅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예술인으로서 그의 보람찬 삶은 공화국의 품에서 꽃펴났습니다.
  그는 1951년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에 출연한 때부터 근 20년동안 수십편의 예술영화들에 출연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본인자신도 알지 못하는 창작적개성을 발견하시고 그가 희극배우로 역형상을 훌륭히 수행할수 있도록 내세워주시고 세심히 지도해주시였습니다. 
  김세영선생의 영화배우 경력에서 후반부에 속하는 희극배우 20년간은 삶의 최절정이였습니다.


 
  그는 《안해의 일터》,《공중무대》,《북은 내가 치겠소》, 《우리 집문제》를 비롯한 많은 경희극적인 영화들에서 주역을 맡아 수행하여 온 나라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배우가 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세영선생이 뜻밖의 사고로 사경에 놓여있을 때 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온갖 조치를 다 취해주시고 끝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정말 아까운 동무, 재능있는 배우를 잃었다고 몹시 가슴아파하시면서 화환을 보내주시고 신문,방송에 부고도 내도록 하시였으며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습니다. 
  희극적웃음의 색채가 짙은 특색있는 연기로 사람들에게 희열과 랑만을 안겨준 인민배우 김세영선생!
  그가 예술영화들을 통해 남긴 많은 웃음은 배우로서의 한갖 연기형상이 아니라 행복한 세상에서 더없이 값진 삶을 누려가는 그 자신의 마음속에 고패치던 긍지감과 행복감의 분출이였습니다.